
어릴 때부터 스프를 종류의 음식을 좋아했던 나는 그 중에서 단호박 스프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가 단호박 스프를 매우 좋아하셔서 양식집을 가면 단호박 스프를 꼭 드셨는데 어린아이 입맛으로는 맛없어 보이는 단호박이 스프로 변했다는 사실에 더욱 입을 대지 않았다. 하지만 어른이 된 지금은 어릴 때와는 다르게 단호박 스프가 맛있게 느껴졌다. 물론 여전히 좋아하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는 없지만 가끔 호텔 뷔페에서 단호박 스프가 나오면 한 번씩 꼭 먹어보긴 한다. 그러다가 요리를 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단호박 스프를 만들었는데 쉬워보이는 음식처럼 보였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단호박 수프를 처음 만들었을 때는 그냥 단호박을 쪄서 믹서에 갈고 우유를 부었다. 맛이 없지는 않았는데 뭔가 밍밍했다. 단호박 향이 약하고, 먹고 나서 인상에 남는 게 없었다. 두 번째엔 크림을 더 넣어봤는데 이번엔 유제품 맛이 너무 강하게 올라와서 단호박인지 크림인지 구분이 안 됐다. 재료는 같은데 결과가 계속 달랐다. 이유를 나중에 알았는데, 단호박을 볶는 과정을 빠뜨린 게 문제였다.
유럽 레스토랑에서 펌킨 수프를 먹어보면 한국에서 익숙하게 먹는 단호박 수프와 맛이 다르다. 달지 않고, 호박 본연의 향이 훨씬 진하다. 차이는 조리 방식에서 나온다. 쪄서 가는 방식과 볶아서 수분을 날린 다음 끓이는 방식은 결과물이 완전히 다르다. 이번 글은 볶는 방식으로 수분을 제거해서 호박 맛을 진하게 끌어내는 방법을 정리한 것이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여러 명이 모이는 자리에서 따뜻한 수프 하나를 내기 좋은 요리다. 재료도 간단하고, 시간이 걸리는 단계가 볶는 것 하나뿐이라 어렵지 않다.
- 이 글에서 해결되는 것: 단호박 수분을 볶아서 제거하는 이유와 방법
- 육수 선택 기준과 유제품 비율 조절
- 유럽식 펌킨 수프와 한국식 단호박 수프의 조리 방식 차이
재료 (3~4인분 기준)
주재료: 단호박 1개(중간 크기), 버터 또는 식용유 2큰술, 소금 적당량, 후추 적당량
육수·마무리: 양지 육수 또는 채소 육수 500~600ml, 생크림 50~80ml(취향에 따라 조절), 트러플 오일 소량(선택), 볶은 버섯(토핑용, 선택)
단호박은 껍질을 도톰하게 벗겨야 한다. 껍질 가까이에 녹색 부분이 남으면 완성된 수프 색이 노란색이 아니라 탁한 색으로 나온다. 씨는 발라내고 듬성듬성 자른 다음 볶기 좋은 크기로 다시 작게 잘라둔다. 작을수록 수분이 더 잘 빠진다.
육수는 양지 육수를 쓰면 감칠맛이 더해진다. 마트에서 파는 육수팩도 괜찮고, 없으면 채소 육수로 대체해도 된다. 물만 쓰면 수분을 날리고 다시 물로 채우는 셈이라 의미가 없다.
볶지 않으면 나오지 않는 맛이 있다
단호박을 쪄서 믹서에 갈면 수분이 그대로 남아있다. 이 상태에서 끓이면 단호박 향이 물에 희석되어 진하게 나오지 않는다. 볶는 과정은 이 수분을 먼저 날려서 단호박 조직 안에 있는 향과 단맛을 응축시키는 작업이다.
팬에 버터나 식용유를 두르고 자른 단호박을 넣는다. 이때 불을 세게 하면 겉이 튀겨지듯 익어버리니 반드시 약불에서 시작한다. 소금을 먼저 넣으면 삼투압 작용으로 수분이 더 잘 빠진다. 후추는 나중에 수프를 끓일 때 넣는다. 천천히 저으면서 단호박 조직이 눌리면서 터지기 시작할 때까지 볶는다. 수분이 충분히 날아가면 단호박이 부드러워지고 팬 바닥에 살짝 노릇한 색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 상태가 됐을 때 육수를 붓는다.
처음 볶을 때 넓은 팬을 쓰는 이유가 있다. 좁은 냄비에 넣으면 단호박이 겹쳐서 수분이 안으로 갇힌다. 넓게 펼쳐놓고 약불에서 천천히 볶아야 수분이 위로 증발한다. 이 과정을 급하게 하면 향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두 번 실패한 이유, 크림 비율과 볶음 시간
처음 실패는 크림을 너무 많이 넣은 것이었다. 부드럽게 하려고 생크림을 넉넉히 넣었더니 단호박 맛보다 유제품 맛이 먼저 왔다. 숟가락으로 떠먹는 내내 크림만 느껴졌다. 생크림은 50~80ml 정도가 적당하다. 많이 넣을수록 노란색도 옅어진다.
두 번째 실패는 볶는 시간을 줄인 것이었다. 빨리 끝내려고 중불로 올렸더니 겉만 익고 수분이 충분히 빠지지 않았다. 그 상태에서 육수를 넣고 끓이니 수프가 묽고 향이 약했다. 단호박 1개 기준으로 약불에서 15~20분은 볶아야 수분이 충분히 날아간다. 팬에 수분이 거의 보이지 않고 단호박이 눌러보면 쉽게 으깨지는 상태가 됐을 때가 육수를 넣을 타이밍이다.
볶는 과정에서 기름을 너무 많이 쓰면 수프 표면에 기름이 떠오른다. 버터나 식용유는 팬 바닥이 얇게 코팅될 정도인 2큰술 안팎이면 충분하다.
육수를 넣고 끓이는 단계
볶은 단호박에 육수 500~600ml를 붓고 끓인다. 단호박이 육수에 완전히 잠기지 않아도 된다. 끓으면서 단호박이 더 부드러워지면 핸드 블렌더나 믹서로 곱게 간다. 이때 후추를 넣는다.
갈고 나서 농도를 확인한다. 너무 되직하면 육수를 조금 더 넣고, 너무 묽으면 약불에서 조금 더 졸인다. 원하는 농도가 됐을 때 생크림 50~80ml를 넣고 섞는다. 생크림을 넣은 다음 간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크림이 들어가면 짠맛이 약해지는 느낌이 있어서 소금을 조금 더 보충해야 할 수 있다.
트러플 오일은 아주 소량만 마지막에 떨어뜨린다. 많이 넣으면 단호박 향을 덮는다. 버섯을 따로 볶아서 수프 위에 올리면 식감이 더해진다. 볶은 버섯은 수프 바닥에 먼저 깔고 수프를 부으면 서향이 올라오면서 맛이 좋다.
유럽식 펌킨 수프와 우리가 익숙한 단호박 수프의 차이
한국에서 단호박 수프라고 하면 달고 크림이 진한 맛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카페나 레스토랑에서 파는 단호박 수프도 대부분 그 방향이다. 유럽 레스토랑에서 먹는 펌킨 수프는 달지 않다. 단맛보다 호박 본연의 향과 약간의 짠맛, 후추 향이 먼저 온다.
차이는 재료가 아니라 조리 방식에서 나온다. 쪄서 가는 방식은 단호박의 수분과 단맛을 그대로 살리는 방향이고, 볶아서 수분을 날리는 방식은 단맛보다 향을 끌어내는 방향이다. 어느 쪽이 더 낫다고 할 수 없고, 어떤 맛을 원하느냐에 따라 방식을 고르면 된다. 다만 호박의 맛을 진하게 느끼고 싶다면 볶는 방식이 더 맞다.
유럽에서 단호박 수프를 먹어봤을 때 달지 않아서 낯설었다는 경험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 낯선 맛이 사실 단호박 본연에 더 가까운 맛일 수 있다. 한 번쯤은 달지 않은 방향으로 만들어보는 것도 좋다.
전체 실행 순서
- 단호박 껍질을 도톰하게 벗기고 씨를 발라낸다. 듬성듬성 썬 다음 볶기 좋은 크기로 잘게 자른다.
- 넓은 팬에 버터 또는 식용유 2큰술을 두르고 약불에서 단호박을 볶는다. 소금을 먼저 넣고 수분이 충분히 날아갈 때까지 15~20분 천천히 볶는다. 눌러보면 쉽게 으깨지고 팬 바닥이 노릇해지는 상태가 목표다.
- 육수 500~600ml를 붓고 끓인다. 단호박이 완전히 부드러워지면 핸드 블렌더로 곱게 간다. 후추를 이때 넣는다.
- 농도를 확인하고 조절한다. 원하는 농도가 되면 생크림 50~80ml를 넣고 섞는다. 간을 다시 확인한다.
- 그릇에 담고 트러플 오일 소량, 볶은 버섯(선택)을 올려 낸다.
조리 과정 참고는 아래 영상에서 확인했다.
마무리
단호박을 쪄서 갈던 방식을 오래 써왔는데, 볶는 방식으로 바꾸고 나서 결과물이 달라졌다. 향이 진하고, 먹고 나서 단호박을 먹었다는 인상이 남는다. 수분을 날리는 데 시간이 좀 걸리는 것 빼고는 어려운 과정이 없다. 급하게 불을 높이면 실패하는 요리이기 때문에, 약불에서 천천히 두는 것이 유일한 주의사항이다.
크림 비율은 적게 쓸수록 단호박 맛이 더 잘 산다. 처음에는 50ml로 시작해서 맛을 보면서 조절하는 게 낫다. 육수도 물보다는 양지 육수나 채소 육수를 쓰면 감칠맛이 확실히 다르다. 이 두 가지만 지키면 나머지는 취향대로 조절해도 된다.
겨울에 여럿이 모이는 자리에서 한 냄비 넉넉하게 만들어두면 따뜻하게 먹기 좋다. 달지 않은 단호박 수프가 낯설 수도 있지만, 한 번 만들어보고 나면 이쪽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특히 이걸 만들었을 때, 할머니와 어머니께서 정말 맛있게 드셨는데, 확실히 달지 않아서 그런지 어린 아이들은 좋아하지 않았지만 어른들의 입맛에는 고급스럽고 깔끔하게 느껴져서 집들이나 가족 모임을 집에서 하게 될 때에 만들면 어른들이 좋아할 것이다.